《마음이 가는 길, 그곳이 너의 바다다》 '빙의(憑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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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자서전 작가입니다. 흔히 '대필'이라 하면 그림자처럼 숨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저는 제 직업을 아주, 아주 사랑합니다.
타인의 생애를 기록한다는 것은 그분의 거친 바다에 내 영혼의 조각배를 위태롭게 띄우는 항해입니다. 그것은 의뢰인이 지나온 폭풍우의 한가운데로 제가 직접 들어가는 일이니까요. 단순히 말을 글로 옮기는 기술이 아닙니다. 그분이 견뎌낸 추위와 두려움을 제 감정이 느낄 수 있어야 비로소 한 줄의 진실된 문장이 저에게 찾아오기 때문입니다.
이번에도 저는 긴 여정을 시작하며, 의뢰인(회장님)의 고향을 방문하였습니다. “내 뿌리인 고향과 치열했던 현장을 직접 봐야 글에 생기가 돌지 않겠어요?” 하신 회장님의 제안이 작가로서의 제 본능을 깨우는 신호탄이 되어 책상 위가 아닌, 갯내음과 화약 냄새가 배어있는 회장님의 과거 속으로 걸어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삶의 주 무대가 되었던 남해의 끝자락, 맥전포(麥田浦)와 고성 화약 공장에서 저는 소설(자서전)의 단서를 찾아낼 수 있었습니다. 그 ‘공명(共鳴)의 기록’을 이곳에 남깁니다.
1. 은빛 비늘의 냄새, 소년의 바다를 만나다
남해의 작은 어촌 맥전포에 들어서자, 코끝을 찌르는 비릿한 멸치 냄새가 저를 덮쳤습니다. 서울 촌놈에게는 낯선 비린내였지요. 하지만, 정말 신산했습니다. 그게 강하게 코끝에 느껴질수록 회장님의 과거로 들어가기가 수월했으니까요. 아마도 회장님께는 평생을 지탱해 온 ‘생존의 향기’였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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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장님은 포구에 서서 한참 동안 말없이 바다를 응시하셨습니다. 선장을 꿈꾸던 까까머리 소년은 어느덧 구순을 바라보는 노신사가 되어, 그 시절의 바다를 회한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고 계셨지요. 저는 그 곁에 서서 올망졸망한 섬들이 수석(壽石)처럼 떠 있는 한려수도의 절경을 눈에 담았습니다. 지금은 고요해 보이는 저 바다가, 한 소년에게는 얼마나 넓고 두려운 세상이었을지, 동시에 가슴 벅찬 꿈의 무대였을지 가늠해 보면서. 그러자 그 풍경은 마치 한 인간의 ‘원형(原型)’으로 제 가슴으로 밀려들어 왔습니다.
2. 불꽃과 트라우마, 죽음의 선을 넘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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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로운 바다를 뒤로하고 찾은 곳은 회장님의 인생 2막이 펼쳐진 화약공장. 선장복을 벗고 화약 산업이라는 불모지에 뛰어든 한 남자의 처절한 전장터. 지금은 하나의 마을을 형성하고 있는 듯이 거대한 공장숲이 터를 잡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곳에서 회장님이 겪었던 ‘생사의 공포’를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느꼈던 감정이 회고록 집필하는 내내 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아니 원고에 깊이 몰두할수록 회장님이 겪었을 숱한 폭발 사고와 그로 인한 트라우마에 깊이 몰입되어 약간의 고통까지 느껴지는 듯한 체험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소방차 사이렌 소리만 들려도 심장이 멎는 것 같았지.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창밖을 내다봤어. 내 공장이 불타고 있을까 봐….”
덤덤하게 회고하시던 말씀의 이면에 숨겨진 공포. 이것이 고스란히 저에게 전달이 되었을 때는, 펜이 움직이는 대로 옮겨 쓰기만 하면 되었으니까요. 그래서 저는 몇 번이고 폐허처럼 변해버린 옛 공장 부지를 걸으며 당시의 상황을 복기하였습니다. 특히 2003년 태풍 ‘매미’가 덮쳤을 때, 물과 반응한 화약이 연쇄 폭발을 일으켜 공장이 아수라장이 되었던 그날 밤.
저는 상상 속에서 그날의 현장에 다시 서 보았습니다. 정말 희한한 건, 그날 저는 300미터 밖으로 집기가 날아가고, 시뻘건 화염이 하늘을 뒤덮는 지옥 같은 풍경. 그리고 그 불길 속에서 “내 모든 것이 무너진다”고 느꼈을 회장님의 절망감을 전율하듯 체험하였습니다. 이건 정말 과장이 아닙니다. 글을 쓰는 동안 저 역시 환청처럼 사이렌 소리를 들었으니까요. 책상 앞에 앉아 있었지만, 머릿속은 매캐한 화약 연기로 가득 찬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평온하게 책상에 앉아서 위험한 인생에 몰입할 수 없다’라는 생각이 뼈저리게 와 닿았습니다. 회장님께서는 인터뷰 중 어느 것 하나 허투루 말씀하시는 법이 없었습니다. 화약 반응 같은 전문지식도 제가 온전히 이해하고 체감할 수 있도록 직접 설명해주시고 만져보게 하셨습니다. 덕분에 저는 단순한 관찰자를 넘어 그 간절함에 깊이 동화될 수 있었습니다. 처음 뇌관을 손에 쥐었을 때 느꼈던 그 미세한 떨림까지 문장에 담아내려 몸부림쳤습니다. ‘국내 최초 조난 신호탄 개발’이라는 화려한 영광 뒤에, 이토록 시커멓게 타들어 간 한 인간의 가슴이 있었음을 독자들에게 생생히 전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3. 선친 묘소에서의 다짐, ”마음이 가는 대로 가거라“

답사의 마지막 여정은 고향 문중 산에 모셔진 회장님의 선친 묘소였습니다. 그곳에서 저는 회고록을 관통하는 핵심 메시지이자, 회장님의 인생철학이 된 아버지의 유언을 마주했습니다. 가난했던 시절, 아버지는 생계 수단인 어업 허가권을 반납하고 받은 피 같은 보상금을 선뜻 아들에게 내어주며 말씀하셨습니다.
”네 마음이 가는 대로 가거라.“
묘소 앞에 무릎을 꿇고 절을 올리는 순간, 묘소에 부는 바람이 마치 투박한 어부의 손길처럼 제 어깨를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그 순간, 막막했던 집필의 방향이 선명하게 잡히는 전율을 느꼈습니다. 아버지의 그 깊고 넓은 사랑, 아들의 꿈을 위해 자신의 전부를 내어준 그 희생이야말로 이 책이 담아내야 할 진정한 주제임을 깨달았습니다.
4. 마음이 가는 길, 그 끝에서 만난 희망
《마음이 가는 길, 그곳이 너의 바다다》는 성공한 기업가의 자서전이기 이전에, 척박한 현실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해 나가는 한 인간의 뜨거운 성장 서사시입니다. 멸치 냄새 가득하던 맥전포의 소년은 이제 대한민국 수산업과 방위산업을 이끄는 거장이 되어 우리에게 묵직한 질문을 던집니다.
"당신의 마음은 지금 어디로 향하고 있습니까?“
글을 마무리하며, 저는 다시 한번 고성 공장의 화약 냄새와 맥전포의 바람을 떠올립니다. 이번 회고록은 인생이라는 거친 바다 위에서 표류하는 누군가에게, 자신만의 항로를 찾아낼 용기를 준다면 좋겠습니다.
[Writer's Note] 자서전을 대필하기 전 의뢰인의 고향과 치열했던 삶의 현장을 답사하는 것은 작가로서 지켜야 할 최소한의 예의이자 진정성이라 믿습니다. 머릿속 상상이 아닌, 현장의 흙냄새와 폭발의 공포를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해야만 의뢰인의 삶에 온전히 '빙의(憑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맥전포의 바람과 고성 공장의 땀방울, 그리고 평생을 바쳐 일궈온 불꽃 같은 기록을 문장으로 옮길 수 있어 영광이었습니다. 이 무거운 과업을 믿고 맡겨주신 회장님께 깊은 존경을 표합니다.
글 | 김명화 (자서전 전문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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