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야》 벼랑 끝에서 피어난 국수 한 가닥의 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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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재정(위)에서 바라본 성산서당(아래)
[호야(虎也) 집필 후기]
“한 사람의 인생을 기록하기 위해서는 그가 숨 쉬던 공기, 그가 딛고 자라난 흙의 냄새를 맡아야 합니다. 그래야 활자 속에 진짜 ‘삶’이 깃들기 때문입니다.”
회고록은 단순히 의뢰인의 일대기를 서사적인 나열이나 업적을 알리기 위한 목적에서 기록하지 않습니다. 실패와 좌절, 인내, 성취 등의 경험 이면에 감춰진 유년의 뜰과 성장통, 그리고 그를 지탱해 온 정신적 뿌리를 찾는 여정입니다.
집필에 들어가기 전에 저는 펜을 잠시 내려놓고 회장님의 고향인 경주 안강으로 답사를 떠났습니다.
1. 천 년의 시간이 흐르는 곳, 안강(安康)을 걷다
천 년 고도 경주는 제게 특별하게 다가왔습니다. 화려함 뒤에 가려진, 엄격하고도 서러웠던 한 소년의 ‘원형(原型)’이 숨 쉬는 곳이기 때문이었죠. 서울에서 차를 달려 그곳에 도착했을 때, 가장 먼저 저를 반긴 것은 고즈넉한 바람이었습니다. 회장님이 유년 시절 늘 바라보며 꿈을 키웠을 그 풍경 속에 직접 서 보니, 인터뷰 녹취록 속의 텍스트들이 비로소 입체적인 풍경으로 살아나는 듯하였습니다.
“한 사람의 생애를 기록한다는 것은 그가 평생을 바쳐 쌓아 올린 내면의 성채(城砦)를 방문하는 일입니다.”
저는 그 성채의 입구에서, 가난과 결핍을 반죽해 ‘미정당(米丁堂)’이라는 맛을 빚어낸 한 장인의 뜨거운 눈물을 보았습니다. 또한 가부장적 시대의 그늘 속에서 ‘홀어머니’와 ‘외동아들’이 서로를 붙들고 견뎌낸 시리도록 아름다운 성장통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면에 서린 선비 정신의 엄숙함과 한(恨)의 정서가 제 가슴 속에 고스란히 전달되기에 이를 원고에 풀어내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었습니다.
2. 천 년의 침묵이 흐르는 곳, 성산서당과 수재정![]()
어린 시절의 회장님 생가
경주 안강읍 하곡리. 마을에 들어서자마자 저를 압도한 것은 400년 된 은행나무와 그 뒤로 병풍처럼 펼쳐진 삼성산의 위용이었습니다. 저는 먼저 회장님의 선조인 쌍봉 정극후 선생의 위패가 모셔진 성산서당(聖山書堂)과 수재정(水哉亭)을 찾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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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산서당'과 그 앞으로 흐르는 냇가에서 학동들이 먹을 갈아 글씨를 썼다고 전하는 '너럭바위'
고즈넉한 기와지붕과 대청마루 아래 흐르는 정적. 세월의 흔적을 지닌 고택에 들어서자, 조선 시대부터 이어져 온 서슬 퍼런 ‘양반 사회’의 위엄이 느껴지는 듯하였습니다. 그와 동시에 장자(長子) 중심의 가부장적 질서가 뼈대처럼 굳건하던 공간이라 생각하니 무거운 침묵이 그 시절, 어린 호야가 감당해야 했던 소외감처럼 다가와 가슴이 먹먹해졌습니다.
그 엄숙한 공간 한켠에서 저는 어린 호야의 그림자를 보았습니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장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가문의 중심에서 비껴나야 했던 소년. 위엄 서린 고택의 담장은 어린 그에게 보호막이 아니라 넘을 수 없는 신분의 벽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수재정 앞을 흐르는 계곡물 소리를 들으며 생각했습니다. 어린 호야는 이곳에서 흐르는 물을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멈추지 않고 흘러야만 썩지 않는 물처럼, 언젠가 이 가난과 차별의 굴레를 벗어나 바다로 나아 가리라 다짐하지 않았을까 짐작해 보았습니다.
3. 꿈조차 사치였던 시절, 옥계초등학교의 흙먼지![]()
발길을 돌려 회장님의 모교인 옥계초등학교로 향했습니다. 옥산과 하계가 합쳐져 만들어진 그 교정에서 저는 책보를 허리에 두르고 십 리 길을 내달리던 ‘지각대장’ 호야를 만났습니다. 운동장 한가운데 서서 눈을 감으니, 가난 때문에 상급 학교 진학을 포기해야 했던 열여섯 소년의 탄식이 들리는 듯했습니다.
“앎은 삶이고, 모름은 죽음이다.”
사촌 형에게 들었던 그 한마디가 비수처럼 꽂혀, 평생 배움에 대한 갈증(恨)을 안고 살아야 했던 시절. 또래 친구들이 교복을 입을 때, 지게를 지고 들판으로 나가야 했던 소년의 아픔이 운동장 흙먼지 속에 배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결핍은 좌절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배우지 못했기에 몸으로 익혀야 했고, 가진 것이 없었기에 스스로 길을 만들어야 했습니다. 옥계초등학교의 교정은 그에게 지식 대신 ‘생존의 야성’을 길러준 훈련장이었습니다.
4. 어머니, 그 아리고도 거룩한 이름![]()
어머니 거동댁의 고향 '양동마을' 모습
회고록 《호야》를 관통하는 단 하나의 단어를 꼽으라면, 그것은 단연 ‘어머니’입니다. 답사 내내 제 마음을 울린 것은 회장님의 성공담 이면에 숨겨진 어머니 ‘거동댁’의 피눈물이었습니다. 젊은 나이에 남편을 잃고, 젖먹이 자식 둘을 먼저 보낸 뒤 홀로 남은 외동아들 호야를 지키기 위해 어머니는 투사가 되어야 했습니다. 양반 가문의 며느리로서 겪어야 했던 모진 시집살이와 가난. 어머니는 아들을 강하게 키우기 위해 매몰차게 대하셨지만, 밤이면 남몰래 눈물을 훔치셨습니다. 회장님이 처음 국수방을 열었을 때, 어머니는 단 하나의 원칙을 당부하셨다고 합니다.
“사람 입에 들어가는 거다. 원가는 생각하지 말고 무조건 사람 몸에 좋고 맛있게 만들어야 한데이.”
그 말씀은 훗날 미정당의 사훈이 되었습니다. 회고록을 집필하며 저는 깨달았습니다. 회장님이 만든 것은 단순한 국수와 떡이 아니라, 평생 자식을 위해 헌신한 어머니의 사랑을 세상에 내놓은 것임을 말입니다.
5. 떡메를 치듯, 시련을 찰기로 승화시키다
회장님의 삶은 정해지지 않은 길을 아름답고 바른길로 만들어가는 과정이었습니다. 농사꾼에서 튀각 장사로, 다시 국수방 주인으로. IMF의 파고와 숱한 사기, 실패의 구렁텅이 속에서도 그는 오뚝이처럼 일어섰습니다. 특히 인상 깊었던 것은 ‘매치는 증숙기’를 개발하던 대목이었습니다. 옛날 어머니들이 힘들게 떡메를 치던 원리에서 착안해, 기계로 떡을 치대어 쫄깃함을 만들어낸 혁신. 그것은 어쩌면 회장님의 인생과도 닮아 있었습니다. 세상이 자신을 매치고, 시련이 자신을 두드릴수록 무너지기는커녕 더욱 단단하고 쫄깃해진 그의 내면처럼 말입니다.
6. 마침내, 헌사가 된 기록
회장님은 원고의 마무리도 본인이 꼼꼼하게 챙기셨습니다. 초고 완성 후 수정 단계에서 컴퓨터 활용에 능숙하지 못하신 회장님을 배려하여 저는 원고를 훑어보시기 수월하시도록 큰 글자 책으로 가제본하여 원고를 전달해 드렸습니다. 그곳에 펜으로 내용을 바로 잡으시거나 추가하셨고, 대화체에 등장하는 경상도 방언도 실제 안강에서 사용하는 사투리로 수정해 나가셨습니다. 직접 체크하실 수 있게 해드림으로써 손수 원고 작성에 참여하신 자긍심도 지니게 되셨으리라 짐작합니다.
원고를 마무리하던 밤의 감회가 떠오릅니다. 경주 안강의 척박한 땅에서 싹 틔운 소년의 꿈이 60년 세월을 넘어 거대한 숲이 되기까지……. 책 《호야》는 한 기업가의 성공 스토리를 넘어, 가부장적 시대의 질곡을 온몸으로 건너온 어머니와 아들의 애절한 사모곡(思母曲)입니다. 집필하는 내내 그 뜨거운 삶의 무게가 제 가슴을 먹먹하게 했습니다.
회장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이 책은 나의 이야기이자, 어머니의 역사입니다. 배우지 못한 한을 풀기 위해 몸부림쳤던 나의 지난날이, 누군가에게는 위로가 되고 희망이 되기를 바랍니다.”
독자 여러분도 이 책 《호야》를 통해, 차가운 밀가루 반죽 속에서 피어난 가장 뜨거운 삶의 온기를 만나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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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er's Note]
누군가의 고향을 밟는다는 건, 그 영혼의 나이테를 어루만지는 일입니다. 안강의 들판에서 마주했던 바람과 수재정의 물소리가 회장님의 말씀과 어우러져 문장 속에 오롯이 스며들도록, 저는 작가로서 최선을 다해 그 숨결을 옮겨 적었습니다.
글 | 김명화 자서전 전문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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