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reeting - Attract
Subtitle

집필후기

집필후기

《묵시》 기록되지 않은 영웅을 되살리는 일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28회 작성일 25-11-30 00:12

본문

유갑순 열사 판결문_국가기록원수집


"누군가의 생애를 기록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숨결을 현재로 불러오는 일입니다. 하지만 그 대상이 역사 속에 철저히 숨겨진 독립운동가라면 어떨까요?"

e84ee517eb69c7fa1b38aee818145422_1765192421_7167.jpg
                                          유갑순 열사_실물 사진


기록되지 않은 역사는 기억되지 않습니다. 누군가의 생애를 다시 쓴다는 것은 단순한 시간을 거슬러서 스토리를 꺼내고 전개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망각의 강을 건너 그 사람의 멈춰버린 심장을 다시 뛰게 하는 ‘소생(蘇生) 작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자서전 전문작가로서 수많은 인생을 마주해왔지만, 독립운동가 유갑순(柳甲順) 열사의 일대기인 소설 《묵시》를 집필하는 과정은 그 어떤 작업보다 고독하고도 뜨거운 싸움이었습니다. 자료는 턱없이 부족했고, 증언해 줄 사람들은 세월과 함께 사라져 버린 뒤였습니다.
오늘은 안개 속에 가려져 있던 독립운동가 유갑순 열사의 삶을 소설로, 아니 ‘역사’로 복원해 내기까지 제가 겪어야 했던 그 치열했던 추적과 집필의 뒷이야기를 전해드리려 합니다.

84cb5fdda3e8620649c9e9c8ef9ff839_1765120999_2184.jpg
독립운동유갑순기념관사업추진위원회 유열규 위원장과의 대담

1. 후손의 간곡한 부탁, “이름과 명예를 찾아 주십시오.”
“작가님, 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초개같이 바치셨으나 세상은 그분의 이름조차 모릅니다. 직계 혈족도 찾을 길 없어 서훈도 받지 못하는 사정이 눈물겹습니다. 잊힌 영웅을 세상 밖으로 꺼내주십시오.”

어느 날 걸려 온 전화 한 통이 저를 100년 전의 역사 속으로 이끌었습니다. ‘묵시 프로젝트’의 시작은 독립운동유갑순기념관사업추진위원회 유열규 위원장님의 끈질긴 열정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위원장님은 저를 찾아와 유갑순 열사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유 열사는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인 1892년 강화 화도면 덕포리에서 태어나 일제 강점기 임시정부의 독립군자금 모집책으로 활동하다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29세의 꽃다운 나이에 순국한 독립운동가입니다.

84cb5fdda3e8620649c9e9c8ef9ff839_1765121023_1088.jpg
유갑순 열사의 생가 터(굴뚝만 덩그러니 남아 있다)

강화도 마리산의 정기를 받고 태어난 유 열사는 대일항쟁에 하나뿐인 목숨을 초개같이 버렸음에도 후대의 관심을 받지 못한 숨은 영웅입니다. 그의 처절한 민족애가 역사 속에 묻혀갈 즈음이던 지난 2018년에야 국가는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습니다.

유열규 위원장님은 후손으로서 유 열사의 이름이 세상에 나올 수 있게 된 감격에 떨리는 마음으로 그의 흔적을 찾아 나섰습니다. 상훈법 시행령에 따르면, 서훈은 직계 및 방계 혈족에게만 전수되므로 백방으로 혈족을 수소문하였으나 찾을 길이 없었습니다.

막막한 심정에 지역의 지도자분들과 논의하여 ’독립운동유갑순기념관사업추진위원회‘를 꾸리고 공적·사적 기록물을 찾기 위해 국가보훈처 등 정부 기관의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었지만, 비밀리에 활동했던 유 열사의 기록은 찾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큰 진전을 이루지 못한 채 시간만 흐르던 지난 2021년, 유 열사가 서대문형무소의 차디찬 감옥에서 순국한 지 100주년이 되던 해에 마침내 결단을 내립니다.

"기록이 없다면 소설 형식으로라도 그분의 정신을 남겨야 합니다. 작가님이 도와주십시오."

유 위원장님은 1년간의 노력에도 성과가 없던 유 열사의 행적 찾는 일에 좌절감이 컸을 법도 한데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곤 어느 날 저에게 유갑순 열사의 일대기 집필을 의뢰하셨습니다. 그 간절함이 저를 움직였고 마침내 무거운 책임감을 안고 펜을 들게 되었습니다.

2. 안개 속을 걷는 기분, 사라진 기록들
하지만 저 역시 마주한 현실은 '막막함' 그 자체였습니다. 유 열사의 직계 혈족은 물론이고 친인척도 찾을 길이 없었고, 여타 기록물도 개인정보 보호법의 한계로 열람조차 할 수 없는 상황만 지속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유 열사의 임무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독립군자금 모금책이었다는 점이 가장 큰 난관이었습니다. 신상 정보는 철저히 기밀에 부쳐졌고, 일제의 감시를 피해 본명 대신 가명으로 활동하였기에 공식적인 기록물을 찾는 게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습니다.

국가보훈처와 정부의 기록 보존소를 샅샅이 뒤졌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자료가 없습니다“라는 대답뿐이었습니다. 강화에서 태어나 경성으로 올라오게 된 계기, 교원 생활을 하다가 독립운동에 투신하게 된 결정적 이유, 그리고 체포되기 직전의 구체적 행적 등 소설을 구성할 핵심 뼈대가 모두 미지수였습니다.

e84ee517eb69c7fa1b38aee818145422_1765192363_1695.jpg
유갑순 열사 체포에 대한 매일신보 기사                                유갑순 열사 체포에 대한 신한민보 기사

초기 조사 단계부터 좌절감을 안긴 건 잘못된 정보였습니다. 당시의 매일신보와 신한민보 기사에 유 열사가 ‘경신학교 재학생’으로 기록되어 있었으므로 현 서울 소재 혜화동에 있는 경신고등학교(구 경신학교)를 찾아갔습니다.

교정 한편에 독립운동가들의 발자취를 전시한 ‘독립관’이 따로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그곳에는 안창호, 정재용 등 우리가 기억하는 영웅들의 이름이 빼곡하게 기록되어 있었으나 낡은 학적부를 먼지 나도록 뒤지고 대조해 보아도 허사였습니다. 그 어디에도 ‘유갑순‘이라는 이름 석 자는 없었습니다.

유 열사는 경성학원 교원 속성과정을 밟던 중에 신분을 위장하고 독립운동에 가담해 활동하던 ’가짜 학생‘이었던 것입니다. 서울 종로 누상동 일대에서 경신학교 학생들과 함께 독립운동을 전개하다 체포되면서 언론에 재학생으로 잘못 알려지게 된 것이었습니다. 

비록 학교 기록에서는 그 흔적을 찾을 수 없었지만, 그날의 발걸음이 헛되지 않았던 것은 경신고 독립관에서 마주한 수많은 투사의 피 맺힌 역사였습니다. 그분들의 희생 앞에서 저는 유 열사의 잊힌 생애를 기필코 복원해 내겠다는 묵직한 사명감을 다시금 가슴에 새기게 되었습니다.

팩트 하나를 확인하기 위해 서울과 강화를 오가며, 때론 지치고 막막함을 마주해야 했습니다. 그때마다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것은 무거운 부채감이었습니다. 유 열사의 삶마저 다시 어둠 속에 묻어둔다면 훗날 스러져 간 선열들을 뵐 면목이 없을 것 같았습니다.

3. 흩어진 퍼즐 조각을 맞추다
책상 위에서 한계에 부딪혔을 때는 무작정 현장을 찾아갔습니다. 기자로 활동하면서 늘 머릿속에 "단서는 현장에 있다"는 화두를 떠올렸던 것처럼 발로 뛰어 살아 있는 글을 쓰고자 하였습니다.

먼저 유 열사의 고향인 강화군 화도면 덕포리에서는 유 열사의 생가가 있었던 터를 찾았습니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 집터에 잡초만 무성했는데, 그 수풀 속에서 덩그러니 남아 있는 낡은 굴뚝 하나를 발견했을 때의 전율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기록이 없다면 기억을 찾아 나서야겠다”는 생각으로 유 열사의 주변 인물들을 탐색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강화의 지역 어르신들을 찾아다니며 구전으로 내려오는 이야기들을 채록해 나갔고, 후손들을 찾아 직접 발로 뛰며 그와 관련된 증언을 한마디라도 들을 수 있기를 바라며 인터뷰해 나갔습니다.

그 결과 임시정부 교통국 활동이라는 큰 뼈대 위에, 유 열사 주변 인물들의 활동 이력과 당시 국내 항일운동사를 정밀하게 조사하여 '유추'의 방식으로 빈칸을 채워 나갔습니다. 또한 상해임시정부 교통국 경성 담당 이원직 열사 등의 행적을 역추적하며 유 열사의 숨결을 불어 넣는 작업을 병행해 나갔습니다.

그러기를 1년 남짓. 유 열사의 고향과 지역 어르신들의 희미한 기억 속에서 끄집어낸 활동 이력들을 밟아나가면서 빛도 없이 사라져간 이름이 서서히 깨어나 펜을 쥔 저의 손에 비로소 잡히기 시작했습니다.

4. 100년 전 그날의 함성을 듣다
”역사는 책 속에 갇혀 있지 않습니다. 누군가 피 흘려 지켜낸 땅, 그 뜨거운 흙먼지 속에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유갑순 열사의 독립 의지가 어디서 발원했는지, 그 근원을 찾기 위해 저는 다시 강화로 향했습니다. 1919년 3월 1일, 탑골공원에서 터져 나온 "대한 독립 만세"의 함성은 들불처럼 번져나가 강화도에도 닿았습니다. 특히 강화는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가장 격렬하고 조직적인 만세 시위가 전개되었던 ‘항쟁의 성지’이기도 합니다.

e4b2337d15883e8753b8e1dafd1a8dfe_1764652615_3052.jpg
사)강화3.1운동연구회를 찾아서 

먼저 강화 3.1운동의 진원지를 찾아 강화중앙교회(구 잠두교회)로 발길을 옮겼습니다. 그곳에는 유 열사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던 인물들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습니다. 사)강화3.1운동연구회의 도움을 받아 당시의 활동사를 되짚어보며 다시금 유 열사의 가슴에 불을 지핀 것이 신앙심과 기독교 정신의 발로였음을 확인할 수가 있었습니다.

e84ee517eb69c7fa1b38aee818145422_1765192567_3695.JPG
”결사대장 유봉진, 백마를 타고 종각에 올라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다.“

1919년 3월 18일, 강화 장날에 2만여 명의 군중이 운집한 가운데 ‘결사대장’이라고 쓴 태극기를 두르고 백마를 탄 채 등장해 만세 운동을 지휘했던 유봉진 권사. 유 열사는 어린 시절부터 바로 그 유봉진 선생과 선교사들의 가르침을 통해 인간 존엄의 가치를 깨달았고, 일본 제국주의의 야만적 수탈을 결코 간과할 수 없는 '깨어있는 영혼'으로 성장했던 것입니다.

e4b2337d15883e8753b8e1dafd1a8dfe_1764653764_3172.jpg
강화인 독립운동가(좌측 상단 사진), 강화중앙교회(옛 잠두교회) 건물 내 기념관에 진열된 이동휘(중앙) 대장(우측 상단 사진), 

존스 목사 사진(좌측 하단 사진), 옛 피뫼교회 자리에 세워진 3.1독립만세운동기념비


교회 내 전시관에서 마주한 이동휘 대장과 유봉진 권사의 사진, 그리고 빛바랜 한문 성경 앞에서 저는 숙연해졌습니다. 그들은 교회 안에서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교육구국운동을 통해 인재를 길러내며, 끝내 무장 투쟁으로까지 나아갔습니다. 유 열사 역시 그 거대한 흐름 속에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는 가르침을 온몸으로 실천한 신앙인이자 투사였습니다.

강화의 바람 속에 섞인 그날의 함성을 들으며, 저는 신앙과 애국이 하나 되어 불타올랐던 강화의 정신(精神)을 확인했습니다. 유 열사가 걸었던 그 치열했던 믿음의 길을 복원하는 것이야말로 100년 후를 사는 작가인 제가 감당해야 할 몫임을 깨달았습니다.

5. 결정적 단서, ‘류갑순 심문조서’를 찾아내다
유 열사의 자주독립에 대한 의지와 열망의 배경이 된 3.1운동의 역사적 연구 자료가 선행되면서 골격을 세워나갔고, 강화에 이어 서울 종로 누상동 도상에서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기 전까지의 활동 근거 관련 자료도 확보해 나갔습니다. 최대한 역사적 자료를 철저한 고증과 더불어 지역 주민들의 증언을 덧입혀 유추를 통한 스토리텔링에 매달렸습니다.

e4b2337d15883e8753b8e1dafd1a8dfe_1764653267_6537.jpg
유갑순 심문조서 문서 중 일부 내용 캡처

하지만 소설의 생명이라 할 수 있는 ‘클라이막스’를 완성할 결정적인 팩트가 절실했습니다. 체포 당시의 긴박함, 일제 경찰 앞에서도 굴하지 않았던 그의 기개를 단순히 상상력만으로 채우기엔 역사의 무게가 너무 무거웠습니다.

고민이 깊어 갈 즈음, 기적 같은 단서를 확보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후손 중 한 분이 어렵게 찾아낸 문서를 보관 중이라는 문서를 손에 쥘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류갑순 심문조서>였습니다.

유(柳)가 아닌 류(柳)로 기록된 탓에 발견되지 않았던 그 오래된 문서 파일. 떨리는 손으로 파일을 열었을 때, 저는 100년 전의 차가운 취조실 한가운데로 빨려 들어가는 듯했습니다.

그 조서 안에는 유갑순 열사가 누상동 노상에서 체포되던 날의 긴박함과 일제 경찰에게 받았던 고문과 협박을 받으며 심문한 내용이 상세하게 일본어로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그 문서의 행간에는 죽음 앞에서도 동지들을 지키려 했던 그의 침묵과 처절한 항변이 생생하게 날인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안개 속에 가려져 있던 마지막 퍼즐 조각이 맞춰지는 순간이었습니다.

84cb5fdda3e8620649c9e9c8ef9ff839_1765121116_2502.jpg
서대문형무소 내 조성해 놓은 감방 안과 심문조서실 모습

이 '심문조서' 덕분에 소설의 클라이막스는 단순한 픽션이 아닌, 피 끓는 '팩트'가 될 수 있었습니다. 누상동 노상에서 체포되기 직전의 긴박함과 취조 과정에서의 처절한 투쟁을 선명하게 묘사하며, 저는 비로소 작가가 아닌 목격자의 심정으로 원고를 써 내려갈 수 있었습니다.

6. 마침표를 찍으며 : 역사와 함께 부활하다
역사학자 이덕일 선생은 “몸은 비록 죽었어도 희생자의 정신은 그렇게 역사와 함께 부활하는 것이다.”

일제강점기, 가장 치욕적이고 잔인했던 그 시절. 자신의 목숨을 새털처럼 가벼이 여기며 조국의 거름이 되기를 자처했던 유갑순 열사. 이 책은 그 숭고한 정신을 되새기려는 유열규 독립운동유갑순기념관사업추진위원회 위원장을 비롯한 후손들의 눈물겨운 노력 끝에 탄생할 수 있었습니다.

84cb5fdda3e8620649c9e9c8ef9ff839_1765121160_0477.jpg
강화 덕포리에 내걸린 '묵시' 출간 기념 플랭카드

소설 《묵시》는 실존 인물인 유갑순 열사의 독립투쟁을 그린 작품입니다. 한 많은 일제 강점기, 불의에 굴하지 않고 아나키스트로서의 순수성과 독립을 향한 불굴의 의지로 삶을 불살랐던 유 열사. 그의 고귀한 희생정신을 기억하려는 후손들에 의해 마침내 소설로 복원하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소설 《묵시》는 역사의 뒤안길에서 이름도 없이 잊힌 영웅에 대한 헌사이자,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기억해야 할 역사적 진실입니다. 자서전 작가로서 이토록 뜨거운 삶을 기록할 수 있어 영광이었습니다.

---
[Writer's Note]
대필은 의뢰인의 마음속에 있는 진심을 세상 밖으로 꺼내는 작업입니다. 유갑순 열사의 일대기를 통해, 잊혀 가던 역사의 한 페이지가 독자 여러분의 가슴속에 새겨지기를 바랍니다.

글 | 김명화 자서전 전문작가

84cb5fdda3e8620649c9e9c8ef9ff839_1765121199_7386.jpg
#자서전 #자서전 대필 #자서전 대필 작가 #대필 작가 #자서전 작가 #회고록 #회고록 작가 #글쓰기 #자서전 쓰기 #대필 비용 #대필 작가의 소양 #교감 #공감 #경청 #인터뷰이 #인터뷰어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