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남긴 유산, "읽고 쓰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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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좋은 사람’은 많지만, 내 영혼의 밑바닥까지 온기를 전해주는 ‘진국’을 만나기란 밤하늘의 별을 따기보다 어렵습니다. 이해타산 없이 자신의 가장 좋은 것을 내어주고, 상대의 태도와 상관없이 한결같은 선함으로 주위를 물들이는 사람. 그런 이를 만나는 건 생의 가장 큰 행운일 것입니다.
인간관계는 거울과 같다고 하지요. 내가 그런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면, 어쩌면 나 자신이 아직 그런 그릇이 못 되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살아온 날들을 반추해 보니 스쳐 간 인연은 많았으나, 표리(表裏)가 일치하고 티끌 하나 없이 순백한 영혼을 가진 사람은 오직 한 분뿐이었습니다.
나의 육신을 축조(築造)하고 영혼의 숨결을 불어넣으신 분. 당신의 뼈를 깎아 나의 뼈를 세우고, 당신의 피를 나누어 나의 심장을 뛰게 하신 분. 바로 나의 어머니입니다. 어머니는 내가 세상에 눈뜨기 전부터 내 존재의 우주였으며, 혼돈 속에서 나를 바르게 세워준 유일한 나침반이셨습니다.
어머니는 천상의 여자였습니다. 아담한 체구에 오목조목한 이목구비는 빚은 듯 고우셨고, 단단하면서도 유연한 물푸레나무처럼 강인한 생명력을 지니셨습니다. 그 조그만 몸은 잠시도 쉬는 법이 없었습니다. 흙 마를 날 없는 노동의 시간 속에서도 어머니는 늘 동동거리는 발걸음으로 삶을 건너오셨습니다. 어머니가 얼굴에 분을 바르고 입술에 붉은 루주를 칠하기 시작한 건, 그 치열했던 노동의 속도가 조금 늦춰진 노년에 이르러서였습니다.
하지만 어머니의 진짜 아름다움은 거친 손끝에서 피어나는 지성(知性)이었습니다. 부뚜막이든, 수돗가든, 대문간이든 어머니는 엉덩이를 붙일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서든 책을 펼치셨습니다. 마치 주문을 외우듯 활자를 탐독하고, 주머니에 몽당연필을 찔러 넣고 다니시며 기록하셨습니다.
“공부해서 출세해라”라는 세속의 말 대신 “읽고 쓰거라”라는 말씀을 주문처럼 남기셨던 어머니.
그것은 단순히 지식을 쌓으라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읽고 씀으로써 비로소 ‘사람다운 정신’을 지킬 수 있다는 당신만의 고귀한 철학이었습니다.
일제 강점기, 그 엄혹한 시절에도 중학교를 다니며 배움의 기쁨을 만끽하셨던 소녀. 전쟁과 가난이 앗아간 청춘의 꿈을 어머니는 평생 활자 속에서 붙들고 계셨는지도 모릅니다. 이제 요양원의 창가에 앉아 백태(白苔) 낀 눈을 껌뻑이며 신문을 읽으시는 어머니를 봅니다. 흐릿해진 시야가 답답하신지 자꾸만 휴지로 눈가를 훔치시면서도, 끝내 손에서 글을 놓지 않으십니다.
어머니가 글을 읽고, 그 총기 어린 눈으로 딸을 알아보시는 시간이 우리에게 조금 더 허락되기를…. 당신이 내게 물려준 ‘읽고 쓰는 삶’으로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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