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서전, 존재의 심연을 응시하고 삶의 가치를 재건축하는 기술
페이지 정보

본문
1. 자서전의 이론적 정초(定礎): 필립 르죈의 ‘자서전적 규약’
자서전이라는 장르가 현대 문학 비평의 장(場)에서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프랑스의 문학비평가 필립 르죈(Philippe Lejeune)의 연구 덕분입니다. 1975년, 그는 자서전을 “자신의 인성(人性)을 탐구 대상으로 삼아 산문 형식으로 기술한 이야기”라고 정의하며 이 모호했던 장르에 명확한 학술적 지위를 부여했습니다.
그의 기념비적인 저서 『자서전의 규약(Le Pacte autobiographique)』은 자서전 연구의 바이블과도 같습니다.
르죈은 이 책에서 시학(詩學), 비평, 역사라는 세 가지 거대한 축을 중심으로 자서전을 해부했습니다. 그는 자서전을 사회학적 맥락에서 고찰하고, 저자와 독자 간의 신뢰를 바탕으로 한 ‘규약’으로서의 정의를 확립했습니다.
나아가 인접 장르와의 변별성을 명확히 함으로써, 한 작가의 작품 세계 내에서 자서전 텍스트가 점유하는 독자적인 위치와 기능을 정립했습니다. 오늘날 자서전 연구의 거의 모든 논의는 르죈이 닦아놓은 이 이론적 토대 위에서 이루어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2. 한국적 자서전의 진화: 방법론적 모색과 확장
서구의 이론이 국내에 유입되면서, 한국에서도 자서전에 대한 관심이 태동했습니다. 초기에는 『잃어버린 나를 찾아서』를 쓴 이원구 씨가 자서전의 필요성을 언급하며 대중의 환기를 이끌어냈으나, 당시에는 구체적인 집필 방법론까지 나아가지는 못했습니다.
이후 학계와 교육 현장에서는 이를 구체화하려는 시도가 이어졌습니다. 이남희의 ‘자기발견을 위한 자서전 쓰기’를 필두로, 천정은의 ‘지도 방법 연구’, 김재은의 ‘자전적 글쓰기의 원리와 방법’, 김혜정의 ‘자아 탐색 교육’, 장유경의 ‘경험의 서사화(敍事化)’ 연구 등은 자서전 쓰기를 막연한 회고가 아닌 체계적인 자아 성찰의 도구로 발전시켰습니다.
3. 삶을 가꾸는 글쓰기: 이오덕의 통찰
이러한 방법론적 연구에 생명력을 불어넣은 것은 40여 년간 아이들의 글쓰기를 지도해 온 아동문학가 이오덕 선생의 철학입니다. 저서 『글쓰기 어떻게 가르칠까』에서 그는 글쓰기를 단순한 작문 기술이 아닌 “삶을 바로 보고, 삶을 정직하게 이야기하는 행위”로 정의했습니다.
그는 “글쓰기는 삶을 가꾸는 수단이 되어야 비로소 참된 글이 되고, 살아 있는 글이 된다”고 역설했습니다. 이는 자서전 쓰기가 단순히 과거를 기록하는 박제(剝製) 과정이 아니라, 현재의 자아실현을 돕고 행복한 삶을 경작(耕作)하는 능동적인 수단임을 통찰한 것입니다.
4. 꿈, 응시, 그리고 이야기: 자아실현을 향한 여정
결국 자서전 쓰기의 궁극적인 목적(Telos)은 흐트러진 삶의 조각을 모아 재정립하고, 더 나은 미래로 나아가는 이정표를 세우는 데 있습니다. 이 과정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꿈’, ‘응시(凝視)’, ‘이야기’입니다.
나에게 주어진 생의 궤적을 깊이 응시하고, 그 속에서 나만의 고유한 이야기를 발굴하며, 이를 바탕으로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꿈과 가치를 세우는 일. 만약 우리가 펜을 듦으로써 그러한 성찰의 계기를 만들 수 있다면, 그것은 기꺼이 선택해야 할 생의 의무일지도 모릅니다.
심리학자 에이브러햄 매슬로(Abraham Maslow)는 인간 욕구의 최상위 단계에 ‘자아실현의 욕구’를 놓았습니다. 사회 시스템이 개인의 모든 불행을 해결해 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펜을 들어 자신의 생애를 복기(復棋)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은, 우리가 주체적으로 도달할 수 있는 가장 현명하고 구체적인 행복의 방법론입니다.
자서전, 그것은 지나간 시간을 기록하는 과거형의 작업이 아닙니다. ‘진정한 나’를 완성해 나가는 가장 진보적인 미래형의 프로젝트입니다.

#자서전의이론 #필립르죈 #자아실현 #삶을가꾸는글쓰기 #이오덕 #김명화작가 #인문학칼럼 #경험의서사화 #성찰과치유 #인생기록
- 이전글꿈을 현실로 복제하는 힘, ‘간절함’과 ‘기록’ 25.12.02
- 다음글중장년층 필수 버킷리스트 '자서전 출판' 열풍 25.12.02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